고추의 역사, 한국 음식은 언제부터 빨개졌을까?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빨간 국물에 김치를 한 점 집어 밥 위에 올립니다. 옆에는 고추장이 있고, 반찬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죠.

한국인의 밥상에서 이 붉은색, 빼놓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추도 마늘이나 된장처럼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땅에서 먹어왔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도 김치는 있었고, 조선 사람들은 이미 김치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추는 대체 어디서 왔고, 언제부터 한국 음식의 색깔과 맛을 이렇게 강렬하게 바꿔놓은 걸까요?

고추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놀랍게도 그 출발점은 한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 닿아 있습니다.


고추의 역사와 한국 전통 음식문화

[고추의 고향은 한국도 아시아도 아니었다]

고추속(Capsicum)의 원산지는 멕시코에서 열대 아메리카에 걸친 지역입니다. 오늘날 널리 재배되는 Capsicum annuum 계통도 아메리카에서 기원했고, 고고학 연구를 보면 적어도 약 6,100년 전에는 이미 재배화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식의 상징처럼 여기는 고추의 뿌리를 따라가면, 고대 아메리카 사람들의 식탁을 만나게 되는 셈이죠.

아즈텍을 비롯한 아메리카의 여러 문화권에서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다양한 고추를 활용했습니다. 매운맛은 음식에 강렬한 풍미를 더했고, 고추는 오랜 세월 여러 품종으로 갈라져 나갔습니다.

그러던 고추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진출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고추는 세계여행을 시작했다]

15세기 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고추도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고추 씨앗은 유럽으로 건너갔고, 이후 포르투갈의 교역망 등을 통해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여기엔 고추만의 독특한 장점도 한몫했습니다.

후추처럼 먼 지역에서 완제품을 계속 들여와야 하는 향신료와 달리, 고추는 새로운 지역에서도 직접 재배할 수 있었거든요. 게다가 조금만 넣어도 음식 맛이 확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 아메리카의 작은 열매는 불과 몇 세기 사이 세계 곳곳의 음식문화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인도의 커리, 동남아시아의 매운 음식, 중국의 사천요리처럼 오늘날 각 지역 고유의 전통이라고 믿는 매운 음식문화에도, 사실은 고추가 깊숙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동아시아의 끝, 한반도에도 고추가 도착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고추가 언제 들어왔을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추가 우리나라에 17세기 초엽 전래된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엔 고초·남만초·당초·번초·왜초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고 해요.

고추가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조선 후기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근거로 16세기 말 무렵 전래된 것으로 보는 설명도 있고요.

다만 정확한 전래 경로와 시기를 딱 하루로 못 박기보다는, 16세기 말~17세기 초 무렵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

그럼 고추가 들어오기 전, 조선의 김치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옛날 김치는 지금처럼 빨갛지 않았다]

사실 고추보다 김치의 역사가 훨씬 오래됐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김치처럼 새빨간 김치가 있었던 건 아니겠죠. 고추가 없었으니 고춧가루도 당연히 없었을 테고요.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여러 재료로 발효시키는 음식문화가 먼저 있었고, 그 뒤에 고추가 들어오면서 김치에 새로운 맛과 색이 더해진 겁니다.

이런 점에서 고추는 기존 한국 음식을 없애고 새 음식을 만든 재료라기보다, 이미 있던 발효음식에 새로운 성격을 입혀준 재료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춧가루가 김치에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붉은 김치 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은 김치에서 붉은색을 빼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니, 외래 작물 하나가 한 나라의 음식 이미지를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재밌는 사례입니다.


[고추장도 고추보다 먼저 존재할 수 없었다]

고추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간장과 된장은 고추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걸로 여겨지지만, 고추장은 고추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후에야 만들어진 장이에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고추장이 간장이나 된장보다 늦게 개발됐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뛰어난 장 발효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새로 들어온 고춧가루가 결합한 거죠.

메주와 곡물, 소금이라는 기존의 발효 기술에 고추라는 새로운 재료가 만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장이 탄생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게 음식문화가 발전하는 가장 흥미로운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전통은 늘 옛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재료를 받아들여서 자기 방식대로 바꿔내는 과정에서도 만들어지니까요.


[우리는 왜 고추를 먹으면 맵다고 느낄까?]

고추 특유의 매운맛을 만드는 대표 성분은 캡사이신(capsaicin)입니다.

그런데 매운맛은 단맛이나 짠맛이랑은 좀 다릅니다.

고추를 먹었을 때 입안이 뜨겁고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맛'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캡사이신이 열과 통증을 감지하는 감각을 자극하면서 나타나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재밌는 건, 인간이 이 자극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음식문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이에요.

처음엔 조금만 매워도 물을 찾던 사람이 어느 순간 더 매운 고추를 찾기도 하죠.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매운 음식문화가 발전한 걸 보면, 고추는 인간의 미각뿐 아니라 자극을 즐기는 식문화까지 만들어낸 참 독특한 식재료다 싶습니다.


[아메리카의 고추는 어떻게 한식의 상징이 되었을까?]

고추의 역사를 알고 나면 평범한 김치 한 조각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고추의 조상은 아메리카에서 자랐습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바다를 건너 유럽과 아시아로 이동했고, 수많은 지역의 음식과 만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무렵 한반도에 들어온 고추는, 이미 있던 김치와 장 문화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결과 고춧가루 없는 김치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됐습니다.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자란 토종 작물이라서 한국 음식의 상징이 된 게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낯선 식재료를 우리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발효와 저장이라는 기존 음식문화와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한국의 고추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 김치나 고추장을 만나게 되면 한번 떠올려보세요.

그 붉은색 한 숟가락 안엔 아메리카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너 조선의 밥상까지 도착한, 수백 년에 걸친 고추의 긴 여행이 숨어 있습니다.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