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저희 집 부엌 찬장 한쪽에는 늘 하얀 플라스틱 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면 하얀 결정 가루가 들어 있고,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어머니가 숟가락 끝으로 아주 조금 떠 넣던 그것. 바로 미원이었습니다. 국물 맛이 뭔가 밍밍하다 싶을 때 그 가루를 살짝 넣으면 신기하게도 맛이 확 살아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가루를 두고 "그거 몸에 안 좋은 화학조미료 아니야?"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자랐습니다. MSG라는 이름만 들어도 괜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 이 조미료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보다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MSG는 실험실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괴상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우리가 수천 년 동안 국물 요리에서 느껴온 그 깊은 맛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조미료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MSG는 해롭다'는 인식이 제대로 된 과학적 근거보다는 오해와 소문이 먼저 퍼지면서 굳어진 이미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 어린 시절 부엌 찬장 속 그 하얀 가루의 진짜 정체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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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마에서 시작된 감칠맛과 MSG의 역사를 담은 썸네일 이미지 |
1. 이름 없던 맛, 그러나 자리가 다른 맛
서양의 근대 미각과학은 오랫동안 세상에 단맛, 짠맛, 신맛, 쓴맛, 이렇게 네 가지 맛만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혀의 미뢰가 화학적으로 감지하는 맛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동양에는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오미(五味)'라는 다섯 가지 맛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을 오장과 연결 짓는 전통 한의학의 틀인데, 오미자라는 열매의 이름도 바로 이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인류가 오랫동안 네 가지 맛만 알고 있었다"는 말은 정확히는 서양 근대 과학의 이야기일 뿐, 동양에서는 이미 다섯 가지 맛이라는 발상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전통 오미에 들어가는 매운맛은, 사실 혀의 미각 수용체가 감지하는 '맛'이 아닙니다. 고추의 캡사이신 같은 성분이 통증을 느끼는 감각 수용체를 자극해서 만들어내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현대 미각과학이 새롭게 인정한 다섯 번째 기본맛의 자리에는 매운맛이 아니라 감칠맛, 즉 우마미가 들어갑니다. 같은 '다섯 가지 맛'이라는 틀 안에서도 동양의 오미와 서양 과학의 다섯 가지 기본맛은 구성원이 절반쯤 다른 셈입니다.
그리고 이 감칠맛, 다시마로 우려낸 국물에서 느껴지는 그 깊고 풍부한 맛은 서양 과학이 뒤늦게 이름 붙이기 훨씬 전부터 동아시아의 부엌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누구도 이것을 독립된 하나의 맛으로 분류하지는 못했고, 그저 "맛있다"는 감탄사로만 뭉뚱그려 표현할 뿐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며 자랐습니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고 두부와 호박을 넣어 끓인 찌개, 잘 익은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 이 음식들의 깊은 맛을 두고 우리는 그저 "감칠맛이 난다"고 표현해왔습니다. 사실 이 감칠맛이라는 우리말 자체가, 서양의 '우마미'라는 이름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습니다. 이름 붙이지 못했을 뿐, 이 맛의 존재 자체는 동아시아 부엌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셈입니다.
2. 1908년, 다시마 국물 속에서 찾아낸 정체
1908년, 일본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는 다시마 육수를 연구하다가 특별한 성분을 분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글루탐산이었습니다.
그는 이 맛이 기존의 네 가지 맛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일본어로 '맛있다'는 뜻의 우마이(うまい)에서 이름을 따 우마미(Umami)라는 새로운 맛의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오늘날 우마미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과 함께 다섯 번째 기본 맛으로 세계 과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막연히 "맛있다"고만 느꼈던 감각에 정식으로 이름이 붙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케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글루탐산에 나트륨을 결합하면 이 감칠맛을 훨씬 안정적으로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글루탐산나트륨, 즉 우리가 아는 MSG(Monosodium Glutamate)입니다. 1909년 일본에서는 '맛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아지노모토(Ajinomoto)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초의 MSG 제품이 출시되었고, 순식간에 일본 가정의 부엌을 파고들었습니다.
3. 그리고 한국에도 하얀 가루가 상륙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나라 이야기입니다. 아지노모토가 일본을 휩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도 비슷한 조미료가 등장합니다. 바로 미원입니다.
1956년, 지금의 대상그룹의 전신인 동아화성공업이 국내 최초로 MSG 조미료 미원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품이었습니다. 국이나 찌개, 나물 무침 어디에나 살짝만 넣으면 맛이 확 살아나는 이 가루는 순식간에 전국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 세대뿐 아니라 할머니 세대에게도 미원은 부엌의 상비약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나이대라면 누구나 집 어딘가에서 저 하얀 통을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4. 미원과 미풍, 조미료 시장의 은밀한 전쟁
여기서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원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하자, 1963년 제일제당(지금의 CJ제일제당)이 경쟁 제품인 미풍을 출시하며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두 회사의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습니다. 제조 공법과 품질을 두고 서로 신경전을 벌였고, 광고에서도 각자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부딪혔습니다. 이 조미료 전쟁은 수십 년간 이어지며 한국 식품업계의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로 자리 잡았는데, 결국 시장에서는 먼저 자리 잡은 미원이 오랫동안 우위를 지켰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조미료 하나를 두고 대기업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했다는 사실이 새삼 재미있습니다.
5. 사실 우리는 매일 자연 그대로의 MSG를 먹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MSG만 특별히 인공적인 화학물질이라고 생각하지만, 글루탐산 자체는 자연에도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다시마, 토마토, 파마산 치즈, 멸치, 김치, 된장, 간장, 버섯. 이 식품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글루탐산을 다량 함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익은 김치찌개나 구수한 된장찌개를 맛있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 감칠맛 성분 때문입니다. 결국 MSG는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던 맛의 성분을, 더 정제되고 안정된 형태로 추출해낸 것에 가깝습니다.
6. 편지 한 장이 만든 '악마의 조미료'
1968년, 세계적인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 의학저널(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짧은 편지 한 통이 실렸습니다.
미국의 의사 로버트 호 만 콱(Robert Ho Man Kwok)은 중국 음식점을 다녀온 뒤 목이 저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특정 원인을 단정하지는 않았고, 간장이나 조리용 술, 나트륨, 혹은 MSG 등 여러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하며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다"는 의견을 남겼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편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언론은 이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사람들은 어느새 '중국음식증후군(Chinese Restaurant Syndrome)'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한 과학적 검증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중국 음식에는 MSG가 많이 들어가서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 나간 것입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MSG는 '몸에 좋지 않은 화학조미료'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계 곳곳에서 중국 음식과 함께 부정적인 상징처럼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자들은 이 주장도 하나씩 검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된 다양한 임상시험에서는 일반적인 식사에서 사용하는 양의 MSG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일관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일부 사람은 공복 상태에서 매우 많은 양의 MSG를 단독으로 섭취했을 때 일시적인 두통이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증상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실제 식사와 같은 조건에서는 이런 결과가 반복적으로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의학계에서도 '중국음식증후군'이라는 표현 자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할 뿐 아니라 특정 문화권의 음식을 부정적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대신 'MSG 증상 복합체(MSG Symptom Complex)'라는 보다 중립적인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일반적인 식사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돌이켜 보면, MSG를 둘러싼 논란은 과학보다 소문이 먼저 앞서간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 정작 과학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세계 각국의 연구기관이 MSG의 안전성을 꾸준히 검증했습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식량농업기구(FAO)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품첨가물 전문가위원회(JECFA), 유럽식품안전청(EFSA) 등은 일반적인 섭취 수준에서 MSG가 안전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혀 왔습니다.
물론 매우 많은 양을 한꺼번에 섭취하면 일부 사람에게 일시적인 두통이나 불편감이 나타날 수 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MSG만의 특별한 위험이 아니라, 소금이나 카페인을 과도하게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과학적 결론과 대중의 인식 사이에 이렇게 큰 간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습니다.
8. '무조미료'라는 마케팅의 시대
이 오해는 한국에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2000년대 전후 한국에서는 식당마다 "무조미료", "조미료를 넣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거는 것이 하나의 마케팅 전략처럼 유행했습니다.
건강하고 정직한 식당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앞다투어 이런 문구를 붙였는데, 정작 그 논리를 따라가 보면 다소 이상한 지점이 있습니다. 소금이나 설탕도 과하게 쓰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유독 MSG만 죄악시된 셈이니까요. 그 시절 저 역시 '무조미료' 간판이 붙은 식당을 괜히 더 신뢰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머쓱해지는 대목입니다.
9. 백종원이 바꿔놓은 인식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는 이 오래된 편견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방송인이자 요리연구가인 백종원이 여러 프로그램에서 MSG, 특히 미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면서부터입니다.
그는 여러 방송에서 "적당히 쓰면 오히려 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조미료"라는 취지로 MSG를 소개했고, 이 발언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랫동안 죄인 취급을 받던 조미료가 유명 셰프의 입을 통해 다시 평가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이후 마트에서 미원 판매량이 다시 늘었다는 이야기가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방송 발언이 수십 년 묵은 편견을 조금씩 되돌려놓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10. 다시 조명받는 감칠맛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비롯한 세계적인 셰프들도 우마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칠맛을 잘 활용하면 소금 사용량을 줄이면서도 풍미를 높일 수 있다는 연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미움받던 조미료였던 MSG는 이제 다시 과학적인 평가를 받으며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며
저희 집 부엌 찬장에 있던 그 하얀 통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어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국에 넣던 그 가루가, 사실은 다시마 국물 속 감칠맛을 백 년 넘게 연구한 과학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MSG는 실험실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괴물 같은 화학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느껴온 감칠맛이라는 맛에 이름을 붙이고, 그 성분을 정제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그 발견은 세계인의 식탁을 바꾸었고, 한때는 근거 없는 소문 속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조미료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과학과 대중의 인식 모두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음에 뜨끈한 찌개 한 숟갈에서 깊은 감칠맛을 느끼신다면, 그 맛이 단순한 조미료의 힘이 아니라 100년 넘게 이어진 과학과 오해, 그리고 재평가의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도 함께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